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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와 보수의 본질 1부 – 6장. 좌파와 우파의 근원
 
 
앞서 세계관을 이해하기 위해 많은 에너지를 소모했다.
기본적인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이제부터 설명할 내용을 이해하기 힘들기에 길게 설명한 것이다.
이제 본래 목적인 진보와 보수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자.
 
 
이 글은 ‘생물학적인 세계관’을 기반으로 진보와 보수를 설명하므로,
최초의 명칭인 ‘좌파와 우파’라는 용어를 쓸 것이다.
그리고 생물학적 원리를 설명하지만, 사례는 한국 현실정치에서 들 예정이다.
그렇다고 한국정치가 생물학적 영향을 대변한다고 오해해선 안 된다.
한국현실정치는 ‘생물학적 영향의 한 사례’일 뿐이다.
환경이 다른 외국은 같은 상황에서 다른 사례를 보여줄 수도 있다.
자 그럼 시작해보자.
 
 
 
 
■ 좌파와 우파 세계관의 출발점
 
좌파와 우파의 세계관은 ‘인식하는 세상의 크기’에서 비롯된다.
좌파가 인지하는 세상은 크고, 우파가 인지하는 세상은 작다.
여기서 세상은 현시대 우리가 알고 있는 ‘지구’의 개념이 아닌,
원시조상들이 인식하던 ‘어디까지가 내가 살고 있는 곳(세상)인가?’의 개념이다.
다른 각도로 보면 '어디까지 고려해야 하나?'라는 물음이며,
이는 곧 ‘인식이 닿는 거리’라고 할 수 있다.
 
세계관에서 인식하는 세상이 크면 클수록 더 멀리까지 고려한다.
이 '인식하는 세상의 크기'는 타고나는 것이며,
내가 인식하는 세상 너머는, 나와 다른 세상이거나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세상으로 인식 한다.
 
 
 
이렇게 세계관에서 작용하는 인식의 거리를 “무의식적 인지거리”라 정의하자.
세상을 넓게 보는 좌파는 무의식적 인지거리가 길고,
세상을 좁게 보는 우파는 무의식적 인지거리가 짧다. (이후부터 ‘인지거리’로 표현)
이 인지거리의 길이가, 우리의 인식체계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끌고 간다.
 
 
인지거리가 긴 좌파는 무의식에서 고려하는 대상이 지정범위(세상) 전체까지 닿는다.
‘세계전체’를 세상으로 볼 경우, 세계를 모두 포함해서 인식하고,
‘국가(한국)’를 세상으로 볼 경우, 국가 전체를 인식한다.
 
 
 
 
인지거리가 짧은 우파는, 지정범위(세상) 내에서 자신이 필요한 방어적 거리까지만 고려한다.
‘세계전체’를 세상으로 볼 경우, 우리나라까지만 인식하고,
‘국가(한국)’를 세상으로 볼 경우, 자신이 사는 범위(지역, 직장)까지만 인식한다.
‘직장’이나 ‘친척’을 범위로 정하면, ‘우리 팀’,‘내 가족’까지만이다.
그 너머는 고려할 필요가 없고,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세상이 된다.
기준이 어떻든 ‘우리’라고 할 만한 범위까지만 인식하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우리가 남이가’로 유명하다.)
 
이런 인식도 세계관의 작용이므로 스스로 자각 하지 못한다.
단지 그 영향만 받으며, 그걸 당연시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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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보수주의의 지역주의
보수주의자들은 지역주의에 더 가까운 특징을 가진다.
즉, 인류 전체보다는 자신이 속한 집단을 더 중요시한다. 이들의 경우에는 자유/압제 기반과
독재에 대한 증오를 이용해서 경제적 보수주의의 수많은 교조를 뒷받침해낸다.
그리하여(진보적 복지국가와 그것이 부과하는 높은 세금으로) 나를 짓밟지 말고, (억압적인 규제로) 내 사업을 짓밟지 말 것이며,
(유엔 및 주권에 해가 되는 국제조약을 만들어) 내 나라를 짓밟지 말라는 주장이 나온다.
따라서 미국 보수주의자에게는 신성한 가치가 평등이 아니라 자유이다.
보수주의자가 자유주의자와 정치적으로 한편이 되는 것도 바로 이 점 때문이다.
출처: [바른마음]-조너선 하이트. 웅진지식하우스. p.32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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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지거리별 존재 비율
 
세상이라는 표현이 ‘세계관적 의미’와 ‘사전적 의미’가 헷갈릴 수 있으니
‘사회’로 치환해서 생각해보자.
사회적 개념으로 이해하면, 좌파의 인지거리는 사회전체까지 닿고,
우파의 인지거리는 자신의 주변까지만 닿는다.
(인지거리가 긴 사람은 좌파가 되고, 짧은 사람은 우파가 되는 것이다.)
 
 
 
어느 사회나 인지거리가 긴 사람의 비율이 30%, 중간이 40%, 짧은 사람이 30%쯤 된다.
즉, 좌파가 30%, 중도가 40%, 우파가 30%쯤 된다는 뜻이다.
물론 민주주의 사회라는 전제하에서다.
비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자신의 성향을 드러내지 못한다.
 
 
 
 
 
이는 생물학적(선천적) 비율이며, 환경이나 양육과정(학습)을 통해 조금씩 달라질 수는 있다.
참고로 [프레임 전쟁]의 작가 조지 레이코프는 좌파가 40%, 중도 20%, 우파가 40% 라 정의했다.
평소에는 30 : 40 : 30 정도의 비율을 유지하다가, 선거 때가 되면 40 : 20 : 40 의 비율로 이동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간의 20%를 끌고 오는 쪽이 이긴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평소 비율이 25(좌) : 40(중) : 35(우) 정도이고, 
선거 때가 되면 35 : 20 : 45 정도로 이동한다.
현시점(2015.9.18)에는 25(새정치+정의당) : 35 : 40 의 지지율을 보이고 있다.
 
 
 
 
 
중도라는 표현에 대해 부정적인 사람도 있을 텐데
조지 레이코프의 실험에 의하면 중도는 ‘이중개념주의자’다.
좌파와 우파의 논리를 모두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중도에 대해서는 별도로 언급할 예정이니, 일단 그런 사람을 중도라고 칭하고,
지금은 좌파와 우파에 관한 내용을 먼저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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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한국의 지지성향 조사
4월 총선, 12월에 대선이 치러졌던 2012년은
무당층(지지하는 당이 없는 사람들 = 중도)의 성향을 파악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사례다.
한국갤럽이 실시한 2012년 1월 여론조사에서 무당층은 41%였다가
총선이 치러졌던 4월에는 25%로 줄어들었다.
총선 이후 무당층은 다시 늘어나 7월 41%, 10월 36%를 유지하다
대선 시기였던 12월에 다시 28%로 줄어들었다.
이 조사에 의하면 무당층은 평상시에는 40% 정도 존재하다가,
선거가 다가오면 25% 내외로 감소한다.
그 차이인 15%는 여당과 야당으로 흡수될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또한 대선보다 총선 시기에 무당층이 더 감소한 것은
상대적으로 대선은 인물 비중이 높고, 총선은 정당의 비중이 높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야당, 진보 정당, 제3세력은 무당층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못하고 있다.
이는 과거의 ‘행동하는 무당층’에 대한 추억 때문이다.
확실하게 2010년 이전에는 무당층이 야당 성향으로 행동했다.
그런데 2010년 지방선거 이후에 치러 진 주요선거에서 무당층은 특정 경향성을 띄지 않고 있다.
여당과 야당으로 골고루 분산되거나, 아예 여당으로 행동하기도 한다.
추억은 추억을 뿐이다. 진보가 무당층을 우군으로 생각한다면 또 한 번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다.
 
출처: [왜 낡은 보수가 승리하는가] – 김상진, 엄경영. 라의눈 출판. p.54~55
(참고로 저자는, 앞으로 무당층은 보수쪽으로 기울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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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지거리의 작용 - 이기주의자 vs 위선자
 
일반적으로 좌파는 우파를 ‘이기주의자’라고 욕하고,
우파는 좌파를 ‘위선자’라고 욕한다.
왜 그럴까?
 
인지거리가 사회전체까지 닿는 좌파는,
뭐든 사회전체를 고려해서 생각하는 게 당연한데, (당연함의 작용)
그러지 않고 ‘자기’ 혹은 ‘소속 집단’만 생각하는 우파가 이기적이라 느낀다.
 
반대로 인지거리가 ‘나와 내 주변’까지만 닿는 우파는,
나와 내 주변까지만 고려하는 게 당연한데, (역시 당연함의 작용)
‘그 너머’를 왜 신경 써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어? 쟤들 왜 멀리까지 신경 써야 한다고 주장하지? 이상한데?
아하~! 자기들이 패권을 장악하려고 그런 소리 하는구나! 짜식들 졸라 위선자네...‘ 라고 느낀다.
 
우파의 눈에는 좌파가 옳음을 이야기 하거나, 인권을 이야기 하는 게,
옳은 척, 바른 척, 인권을 위하는 척 하면서 주도권을 장악하고, 지배세력이 되기 위한 쇼로 보인다.
(본인들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므로)
우파의 인식체계로는 그렇게 밖에 해석이 안 된다.
아무리 아니라고 설명해도, 자신이 가진 당연함을 벗어난 해석을 가질 수는 없다.
(남자가 여자의 말을 해석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간단히 예로,
기근으로 이웃동네 가난한 사람들이 더 힘들어 한다.
이때 좌파가 ‘우리가 그들을 도와주자.’라고 한다면,
우파는 ‘왜 우리가 그들을 도와줘야 하지? 우리 먹을 것도 부족한데?’라고 한다.
좌파의 인지거리에는 그들이 우리와 함께 사는 사람으로 인식되는데 비해,
우파에겐 인지거리 안에 들어오지 않으므로,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셈이다.
그런데도 도와주자는 건, 인기를 얻기 위한 포퓰리즘으로 밖에 해석이 안 된다.
 
이처럼 좌파가 옳은 일을 해도 좋지 않게 보는 건, 모두 위선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이런 시선은 오른쪽으로 갈수록 더 심해진다. 오른쪽으로 갈수록 인지거리가 짧기 때문이다.
(그래서 극우로 갈수록 좌파에 대한 비난이 더 심해진다. 물론 반대도 마찬가지다.)
 
 
 
인지거리가 짧으면, 무의식에서부터 도와줘야 할 필요성을 못 느낀다.
그 느낌과 동기화된 추론은 ‘인기영합이다. 게으르고 무능한 놈들이다.’라는 명분(논리)을 만들어 낸다.
즉, ‘인기영합’과 ‘게으름’ 때문에 도와주기 싫은 게 아닌,
도와주기 싫으니 만들어 낸 이유가 ‘인기영합’과 ‘게으름’, '무임승차' 등인 것이다.
(동기화된 추론은 이런 식으로 작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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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1: 민주화 운동에 대한 인식
 
한국 우파는 민주화운동조차 좌파가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이용한 것이지,
인권을 위한 활동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게다가 시민 자체적인 저항운동이라고 보기에는
아무리 그들의 논리가 좌파 패권주의로 작용한다 해도 이해되지 않는 게 많다.
(우파는 계급지향이므로, 권력자에게 저항하는 것 자체가 불경이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파 기득권들은, 좌파의 활동을 북한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고 가져다 붙인다.
그럼 모든 게 명확해진다.
단순한 저항이 아닌, 북한의 사주를 받은 빨갱이들의 공작이라면,
우파의 인지체계와 맞아 떨어져, ‘옳거니~’ 하고 이해되는 것이다.
그럼 그들의 믿음은 더 확고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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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2: 포퓰리즘에 대한 인식
포퓰리즘이란, 한마디로 인기를 위해 대중이 원하는 것을 막 날리는 것을 말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지키지 못할 공약을 남발하는 것이다.
한국우파가 포퓰리즘을 더 남발하지만 자신들은 아니라고 인식하고,
한국좌파의 주장과 행동은 무조건 포퓰리즘이라고 이해하는 것도, 짧은 인지거리에서 나오는 인식체계 때문이다.
보수의 인식은 “니네는 원래 포퓰리즘만 주장하는 놈들 아니냐.”라는 것이다.
실제 모든 정책이나 행위는 그 반대에 가깝지만, 자신들은 그렇다고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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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등을 추구하는 공동체주의 vs 계급을 추구하는 개인주의
 
인지거리가 사회전체까지 닿는 좌파는
사회구성원 전체가 함께 잘 살아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평등을 추구하는 것이다.
 
인지거리가 나와 내 주변까지만 닿는 우파는,
우리만 잘 살면 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그 너머는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이런 인식은 내가 그들(인지거리 바깥)보다, 더 고귀하다(소중하다)는 느낌을 만든다. (동기화된 추론)
 
그들은 어떻게 되든 말든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니므로, 하찮게 대해도 된다.
이렇게 해서, 하찮은 존재와 고귀한 존재가 나눠진다.
계급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 인지거리 바깥의 재물과 노동력을 착취하는데 있어, 아무런 거리낌을 느끼지 않는다.
그냥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노예제가 있었던 시절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이웃 나라를 침범해 마음껏 죽이고, 살아남은 자를 포로로 잡아와 노예로 삼았다.
이게 우파가 주장하는 약육강식의 사회다. (우파가 힘을 추구하는 이유 중 하나)
 
 
 
(오늘날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모든 인간은 고귀하다.’는 민주주의가 정착된 이후의 명제다.
그 이전까지는 계급사회가 당연했다. 프랑스혁명을 기점으로 우파 지배논리에서 좌파 지배논리로 이동한 것이다.
즉, 민주주의 자체가 좌파의 혁명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인지거리가 짧을수록, 자신이 더 고귀한 존재라는 인식이 강해진다. (동기화된 추론)
그래서 높은 지위나 권력을 얻으려고 더 애쓰고,
높은 자리에 앉으면, 아래를 함부로 대하거나 무시하기 쉽다.
 
 
좌파는 평등을 기반으로 한 공동체를 추구하지만, 개개인은 따로따로 움직인다.
이미 사회전체를 하나의 공동체로 보기에, 그 속에서 각개로 움직이는 것이다.
간혹 단체를 만들더라도 집단이나 조직 보다는, ‘연대’라는 개념을 쓴다.
‘수평적 연결’이라는 인식기반을 가지기 때문이다.
 
우파는 계급을 기반으로 한 개인주의를 추구하지만, 조직을 구성한다.
우파는 사회전체를 공동체로 보지 않기에, 자신의 인지거리 안에서 다시 집단을 만든다.
그래서 우파 쪽은 온갖 이상한 이름의 조직이 넘쳐난다. (이게 우파의 풀뿌리 조직으로 작용한다.)
XXX협회, 000모임, △△△단, OOO본부 등..
 
 
대표적인 예로, 전두환의 ‘하나회’를 들 수 있다.
군대라는 조직 안에서, 다시 자신들끼리 뭉치는 조직을 만들어,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다.
 
2015년 메르스 사태가 일어났을 때 한 의사는 박원순 서울시장을 고발했다.
그런데 고발자 이름은 아직 설립되지도 않은 ‘의료혁신투쟁위원회(대표 최대집)’였다.
(의료혁신투쟁위원회, 박원순 고발…어떤 단체인가 보니
박원순 고발한 '의료혁신투쟁위원회'의 정체는?
 
고발부터 하고 단체설립은 나중에 한 것이다.
단체명으로 하면 더 있어 보이고,
또 대표라 하면 계급을 추구하는 우파사회에서 더 인정해주는 느낌이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 조직, 저 조직 마구 가입해,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는 사람도 있다.
 
결국 이들이 조직을 만드는 이유는, 힘을 키워 더 많은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다.
즉, 개인을 위해 조직을 활용한다는 개념이고, 이것이 계급을 추구하는 개인주의다.
지배계급의 논리지만, 우파의 피지배계층도 이를 수용한다.
(피지배계층이 집단에 집착하는 건 불안 때문인데, 불안은 별도로 다룰 예정이다.
여기서는 개인주의(개인을 위한 집단화)라는 개념만 이해하고 넘어가자.)
 
 
 
 
일반적으로 우파가 중시하는 집단의 최소 단위는 가족이다.
그러다보니 좌파가 사회문제를 이야기 하면, ‘네 가족이나 잘 챙겨라.’라는 비아냥을 듣기 쉽다.
보수적인 사회일수록 이런 가족 이데올로기를 더 강조한다.
얼핏 들으면 당연한 말이고 그럴 듯하지만, 그 배경에는 가족 이기주의가 깔려 있다.
- ‘나만 아니면 돼’, ‘나만 이익이면 그만이야!’
- ‘우리 집만 아니면 돼’, ‘우리 집만 이익이면 돼’, ‘우리 집만 손해 아니면 돼’
이런 말들도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이다.
이런 관점의 [가족주의는 야만이다.] 이라는 책도 있다.
 
 
[가족주의는 야만이다.] 이득재. 소나무 출판사. 2001
 
은밀히 따지면 가족주의가 야만이 아니라, 야만이 가족주의에 집착하게 만드는 것이다.
참고로 좌파가 인식하는 사회전체에는 가족도 포함되어 있으므로, 별도로 강조하지 않는다.
이런 논리 모두 인지거리에서 나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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